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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그리운 이름, 어머니

박인애2018.04.04 17:13조회 수 45댓글 0

국화.jpg

 

 "Fall Merchandise Clearance Sale"

 

 90% 할인이라는 문구에 홀려 걸음을 멈췄다. 가을에 팔던 물건들을 할인해서 파는 코너였다. 얼핏 보니 가을 색 냅킨과 집안에 냄새를 잡아 주는 초가 보이기에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기를 기다렸다.

족히 육십은 넘어 보이는 백인 아주머니가 조화를 카트에 담고 있었다. 노란 국화만 고르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살짝 짜증이 올라오려던 순간 그분의 한쪽 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낯선 사람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아주머니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궁금증이 발동해서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이 많은 꽃을 무엇에 쓰려고 사시는 거예요?”

 “친정어머니 산소 장식하는 데 쓰려고요.”

 “, 그렇군요.”

 “생화를 사다 놓으면 얼마 안 가 시들어 버려서요. 조화로 장식하면 비가와도 젖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다고 친구가 알려주어서 사러 왔어요. 마침 세일 한다는 전단이 왔더라고요. 이것 좀 보세요, 십 불 가까이하던 꽃이 일 불도 안 하잖아요.” 하며 국화에 붙은 가격표를 보여주었다.

 “네네, 정말 착한 가격이네요.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손 빠른 나는 수북하게 쌓인 조화 더미 속에서 노란 국화를 찾아 그녀의 카트에 가득 담아주었다.

 “국화는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에요. 작년에 돌아가셨거든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렇군요. 저희 어머니는 튤립을 좋아하셔서 모종을 사다 산소 주변에 심어 드리곤 했어요. 이젠 미국에 살아서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에요.”하고 나도 말꼬리를 흐렸다. 별생각 없이 나온 말인데 갑자기 어머니란 말에 목이 메었다. 내게 어머니라는 말은 삭지 않은 밥알처럼 그렇게 자주 얹혔다.

그녀가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친했던 언니처럼. 처음 만난 그녀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소통코드는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과 그리움의 색깔이 비슷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어머니란 인종을 떠나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리움의 근원인 듯했다.

 

 우리 어머니는 마흔여덟 살에 돌아가셨다. 의사의 오진으로 엉뚱한 곳만 치료받다가 정작 문제가 있는 곳은 손을 대지 못했다. 의사는 절대 실수도 안 하고, 환자의 병을 낫게 해주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은 믿음 위에 빨간 줄이 그어진 날이었다. 뒤늦게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다. 진찰기록과 환자의 상태를 비교한 의사는 100% 오진이라고 했다. 사인은 디스크에 위궤양이 아니라 장 파열이었다. 처음부터 시설이 갖춰진 큰 병원으로 갔다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잘못된 판단으로 시간을 지체하여 어머니를 보낸 미안함이 옹이처럼 가슴에 박혀버렸다.

 

 포천공원묘지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신 뒤 생전에 좋아하던 튤립 모종을 잔뜩 사다가 산소 주변에 심어드렸다. 아침이면 꽃잎을 활짝 열었다가 저녁이 되면 깍쟁이처럼 입을 꼭 다무는 튤립이 너무 예쁘다며 화분을 사다 놓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곤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머니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이 목에 걸렸다. 참외 철이 되면 참외를 좋아하던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고, 이미자 노래가 흘러나오면 부엌일을 하면서 감칠맛 나게 따라 부르던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그렇게 어머니는 내 삶 속에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오셨다. 그럴 때마다 생전에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하고 후회스러웠다.

 

 서울에 사는 남동생 내외가 어머니 산소에 왔다며 인증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 주었다. 남동생과 이제 막 말문이 터진 어린 조카가 절을 하는 사진이었다.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성묘하는 걸 볼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이다. 산소에 입힌 떼가 누렇게 변했다. 산소 앞에 놓인 돌 화병엔 지난여름 내가 사다 놓고 온 울긋불긋한 조화가 한 아름 꽂혀 있었다. 그분 말대로 젖지도 시들지도 않고 말이다. 중학생인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가는 게 걱정되어 눈도 못 감고 돌아가신 어머니. 그 아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딸까지 데리고 왔으니 얼마나 흐뭇하셨을까?

 

 몇 년 전에 홍수로 포천 공원묘지가 다 쓸려 내려가 초토화된 적이 있었다. 뉴스를 보는 내 마음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친정 식구들이 어머니를 납골당으로 모시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고맙게도 남동생이 비용을 대서 비석도 새로 세우고 산소도 재정비해 놓았다. 출가하여 남의 집 식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람 구실을 못하고 사니 면목이 없다. 그런 제안에 그러자고 척척 돈을 낼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시댁에 돈 쓰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 친정에 쓰는 건 왜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다들 그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만 결혼한 여자의 비애다. 딸자식도 자식인데 말이다.

 

 명절 때면 아껴두었던 마른 나물을 삶아 물에 담갔다가 볶아내고, 오곡밥을 짓고, 기름 냄새 풍기면서 어떻게 우리만 먹겠냐며 이웃집 것까지 넉넉하게 부침개를 부치셨던 어머니.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쌓은 복을 내가 대신 받고 사는 것 아닌가 싶다. 여기저기서 얻은 반찬이 두레 반이다. 요즘은 마켓만 가면 사시사철 푸른 채소를 구할 수 있어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손이 많이 가는 마른 나물을 잘해 먹지 않는다.

오랜만에 나물을 담아 둔 봉지들을 꺼냈다. 꼬깃꼬깃 구겨지고 뒤틀린 나물을 충분히 삶아 물에 담갔다. 오래 묵은 나물 냄새 빠질 때까지 몇 번 정성스레 새 물을 갈아주니 굳었던 나물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운 마음도 엷어진다. 내일은 고사리와 취나물을 볶고, 윤기 잘잘 흐르는 오곡밥도 지어서 건강 잃고 누워계신 어르신들 병문안을 가야겠다. 나누며 사는 것을 유산으로 남겨 주신 어머니가 몹시도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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