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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남편의 빈자리

박인애2019.08.22 23:42조회 수 134댓글 0

 규칙적인 생활의 모델로 꼽히는 칸트Immanuel Kant의 일상은 마치 규칙동사의 규칙처럼 정확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리수 길로 산책하러 나갔는데 그가 길을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오후 330분이라는 것을 알 정도였다고 하니 자기 관리를 잘하고 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계획을 세우지만 제대로 지키고 사는 것이 어려운 나로서는 그런 사람들이 늘 존경스럽다.

 

 우리 집에서 가장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남편이다. 그를 겪어본 사람은 정확하다, 성실하다, 부지런하다, 정직하다, 책임감이 강하다 등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끝내지 못하면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편히 먹지도 못하는 성격이어서 무슨 일을 하던 대충 하는 법은 없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하다. 우리 집에 놀러 와 본 사람들은 남편이 집안일 하는 것을 보며 놀라곤 한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그릇의 물기를 닦아 제자리에 넣어주고, 빨래를 개키고 있으면 개어둔 옷을 제자리에 넣어 준다. 청소는 도맡아 해주니 집안일이 한결 수월하다. 남자들은 남편을 공공의 적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에만 왔다 가면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힌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일 년 열두 달 칼 퇴근을 하여 집에 들어오는 남편이 시카고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모처럼주어진 자유를 누려보자며 외식을 하고 들어와 거실을 폭탄 맞은 것처럼 해 놓고 신나게 텔레비전을 보며 퍼져 있는데 차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카고에 간다고 짐을 싸서 나갔던 남편이 되돌아온 것이다. 악천후라서 비행기가 취소되었단다. 지저분한 꼴 못 보는 남편의 눈 흘김 받으며 밥을 차려주었다.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신 자유부인.

 

 

 출장을 자주 가는 남편과 사는 여자들이 부러웠다. 남편이 집을 비운 동안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남편이 LA지점 오픈 문제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되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이번엔 비행기가 잘 떠 준 모양이다. 안 그래도 리포트에 기말시험 준비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자유 시간인가 싶었다. 게다가 아이까지 방학을 했으니 하늘이 공부하라고 팍팍 밀어주는 것 같았다. 남편이 없으면 자유롭고 밀린 공부를 다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생각은 착각이었다. 공부는 안하고 계속 안 해도 될 일만 찾아하고 있었다. 불안하면 나오는 병이 또 도진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사 먹자는 아이에게 불고기를 재서 밥을 해주고, 옷 넣을 데가 없다며 옷장을 홀딱 뒤집어 정리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남편이 없는 빈자리는 컸다. 없는 동안 저지른 사고의 내용을 다 쓰자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알람 끄는 걸 새카맣게 잊고 아침마다 문을 벌컥 열어 알람을 터트리는 바람에 알람 회사 직원에게 수도 없이 사과를 해야 했다.

알람시계를 끄고 자서 딸내미는 씻지도 못한 채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쓰레기 수거해 가는 날을 깜빡하고 안 내놔서 우리 집 쓰레기만 남았다. 설상가상으로 차고 안에 있던 냉장고가 고장이 나서 작동을 하지 않아 열심히 고아 얼려 둔 곰국과 멸치다시물이 녹아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냉장고 청소를 해야 했다.

꺼진 냉장고에서 나온 상한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삼킨 쓰레기통이 악취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리 집 차고 앞은 온 동네 파리가 떼로 몰려와 축제 중이다. 뜨거운 태양에 단련된 놈들이라 어찌나 목숨이 질긴지 약을 뿌려도 소용이 없고 제 세상 만난 듯 쌩쌩 날아다닌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랑 사는 동안 시계 알람 소리를 먼저 듣고 꺼본 적도, 청소기를 돌려본 적도, 화장실 청소를 해본 적도, 쓰레기통을 내놓은 적도 없다. 그의 규칙적인 일상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커버 하고 있었는지 헤아려 본적조차도 없었다.

부부가 한 번쯤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없어 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니 말이다. 남편의 빈자리를 통해 새삼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내가 온전히 사는 것은 내 덕이 아니라 남편 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사 철이 들려는 모양이다. 이러다 내가 공공의 적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줌마 수다로 여겨 주시고, 혹여 가까이 있어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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