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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영하의 흡혈귀

박인애2018.05.27 19:12조회 수 2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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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는 2000년대를 이끌어가는 현존하는 작가중 한 사람입니다. 소설을 아주 맛있게 쓰죠.

짧은 단편이니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흡혈귀

김영하

 

지난 해 펴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때문에 가끔 이상한 전화나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그 소설에는 자살 안내라는 좀 특이한 일을 하는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독자들 중에는 작가인 나와 그 자살 안내인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대뜸 전화를 걸어와서는 자신이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뭐 해줄 말이 없느냐는 식이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그러겠는가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이다.

오늘 소개할 이 편지도 그런 것 중의 하나려니 하고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편지는 A4용지 크기의 봉투에 담겨 두툼했다. 주소는 컴퓨터로 깔끔하게 인쇄된 것이었고 소인은 서울 도곡동 우체국으로 찍혀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역시 워드 프로세서로 정서한 열 장 가량의 종이가 묶여 있었고 그 밖에 수십 장의 다른 복사지들과 함께 들어있었다. 그 복사지 묶음의 맨 앞장에는 참고 자료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씌어 있었다.

원고 청탁이나 기획서가 아닐까? 출판사 봉투가 아닌 걸로 봐선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천천히 보자. 처음에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에 들어와서 책상 위에 던져놓고는 며칠 동안 잊어버리고 지냈다. 내 생활리듬이라는 게 규칙적이지를 못해서 어떤 때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번도 책상 앞에 앉지 않기도 하는 터라 그 편지는 다를 쓰잘데없는 우편물, 신문 등과 뒤섞인 채로 한참을 그냥 묻혀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1016, 친구의 생일이어서 간단하게 술을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밤이 되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을에 무슨 비가 이렇게 험하게 오나. 나는 창문을 닫아걸고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비는 점점 더 거세어갔고 뇌성벽력도 더 심해졌다. 컴퓨터를 보호하기 위해 전원을 끄려 할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김영하씨 댁인가요?”

전데요. 누구시죠?”

저는 김희연이라고 하는데요. 얼마 전 우편물을 하나 보내드렸는데 기억하실런지......”

김희연. 김희연이라. 그때 번뜩 A4봉투에 담겨있던 그 두툼한 우편물을 기억해냈다. 나는 왼손으로 주섬주섬 책상위의 신문들을 치우면서 그 우편물을 찾았다. 봉투의 왼쪽 상단에 김희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아직 읽지를 못했습니다. 받기는 잘 받았습니다만......”

“......”

여자는 말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나는 머리까지 수그리며 거듭 사과했다.

꼭 읽어주세요. 제딴에는 고심고심하며 쓴 글이니까요. 다 읽으시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늦게 전화드려서 실례가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 전화가 끊겼다. 그때쯤 다시 천둥 번개가 쳤다. 이번엔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문득 온 몸으로 저르르한 소름이 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꼭 공포 영화 분위기였다. 왜 그런 영화에선 무슨 중요한 일이 생길 때면 날씨가 험상궂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일부러 그런 날을 골라 전화를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냥 섬뜩했다. 그건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화선을 통해 전해온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동안 끊겼다가 다시 나오는 수돗물처럼 단속적이었다. 감정이 최대한 억제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젊었는지 늙었는지, 또는 화가 났는지 기분이 좋은지 쉽게 알 수 없는 그런 소리 말이다.

전화를 끊고나서 찬찬히 그녀가 보내온 봉투를 열어보았다. 먼저 열 장 가량의 종이 묶음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첫 문장부터 맞춤법에 맞지 않는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그 점이 글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는 했지만 문장은 의외로 간결하고 산뜻했다. 다 읽고 난 후의 내 감상은 나중에 밝히기로 하고 이 흥미로운 편지를 먼저 소개하기로 하자. 몇 군데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문장은 내가 손을 보았고 맞춤법이 틀린 곳도 고쳤다. 지나치게 비약이 심하거나 감상적으로 흐른 부분도 문맥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삭제하거나 줄였다. 이 점을 참고하면서 봐주시기를 바란다.

 

 

저는 스물일곱 살의 여자입니다. 72년생이죠. 인생이 희망으로 가득하다고 믿고 있을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그런 나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할까요. 여느 소녀들처럼 어린 시절엔 재미있는 소설과 만화를 보며 자랐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같은 순정 만화나 하이틴 로맨스, 할리퀸 문고 따위에 빠져들기도 했지요. 그런 소설과 만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닮은 멋진 남자들을 기다리며 사춘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테리우스나 미스터 블랙 같은 인물 말이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지요. 1990년이었습니다. 대학 생활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지요. 1학년때는 헤매다가 2학년쯤 되면 시들해지고 연애도 한번쯤 하게 되죠. 저도 남자 하나를 만났는데 그렇고 그런 남자였어요. 차 마시면 돈은 당연히 자기가 내고, 여자가 담배 피면 세상 말센줄 알고, 술 취하면 전화하고 뭐 그런 남자요. 한국 땅에 흔해빠진 남자였어요. 처음엔 아, 저 남자가 날 저렇게까지 끔찍하게 생각해주는구나 싶어서 좋았는데, 금세 지겨워졌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무료한 3학년과 4학년이 지나가고 있었죠. 그러다 또 남자 하나를 만났는데 이 남자는 달랐어요. 늪이었어요. 말 그대로 늪.

영화 공부하는 사람이었어요. 열정적이고 세상 물정 모르고 미친 듯이 사는 남자. 멋져 보였어요. 친구 애인이었는데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가 미쳤죠. 맞아요. 그때 목숨 걸었어요. 그 남자 사는 집에 찾아갔어요. 생각보다 쉬웠어요.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죠. 둘 다 젊었으니까요......(이 부분에서 다소 장황하게 그 남자와 만나게 된 경과를 서술하고 있어 일부 생략했다-필자).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남자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여자한테 다가가지는 않지만 오는 여자는 막지 않아요. 그때마다 여자를 갈아치우는 건데, 별 죄의식 같은 건 가지지 않는 남자였어요. 자기는 그럴 만큼 충분히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럴 때 도덕 같은 거 들이대면 비웃어버려요. 낡았다는 거죠.

그 남자 처음 만났을 때, 운동권 영화를 만들고 있었어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16밀리 영화였는데, 완성은 가까스로 했지만 상영은 못 했어요. 대학 같은 데서 몇 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경찰이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무산되기를 반복했어요. 그 팀 전체가 수배됐고 그 사람도 한 반년쯤 도망다녔지요. 주로 우리 집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좋았어요. 왜 그런 생각 가끔 하잖아요. 사랑하는 남자가 한번쯤 입원했으면 하고 바라는 거 말이에요. 꼭 그런 상황이었지요. 제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주고 망도 봐주면서 함께 위험을 감수하는 그런 게 좋았어요.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어요. 그 남자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제 자취방 앞에 여자 구두가 있더군요. 그리고 두 남녀의 소리.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돌아나왔어요. 그 여자가 나올 때까지 길 건너에서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지요.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 기억도 안 나요. 그 여자가 나와서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을 봤어요.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까. 화가 나더군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펴지질 않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새 너무,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거지요. 일어나니까 어지러웠어요. 조용히 제 방으로 들어가 그 옆에 누웠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잠들어 있더군요. 죽여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내 집이고, 그러니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기본적인 예의?”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도전적으로 맞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차마 제 입으로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오지 말아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마저 말하고 나면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였죠.

친구는...... 밖에서 만나면...... 안 될...... 까요?”

그러지 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습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죠. 그래도 연애는 끝나지 않고 계속됐어요. 운동권 영화를 만들던 그가 코믹 멜로물을 만들 때까지 말이에요(이 부분에서 김희연은 애인이 만든 코믹 멜로물에 대한 설명을 길게 하고 있었는데 불필요한 부분이라 삭제했다-필자).

이쯤 되자 그 사람을 더 이상 만나야 할 이유를 아무데서도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러면서도 질질 끌려다니는 거예요. 밤에 찾아오면 같이 자주고 밥 못 먹었자면 밥 사주고 돈 없다면 돈 주고 뭐 그러면서요.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였어요. 그 애인과 함께 일하는 영화판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였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어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눈빛이 아주 묘했어요. 무심한 듯하면서도 의중을 꿰뚫는 듯한, 동굴처럼 깊어 보이는 눈이었거든요. 태도도 특이했어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혼자 술만 홀짝이고 있었지요. 술이 좋아서라기보다 그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그런다는 투로 말이죠. 그리고 그가 앉은 자리 주위에는 늘 일정한 간격이 생기더군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거지요.

나중에서야 그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걸 알게 됐어요. 본업은 시인이라고 하더군요. 문학 평론도 하고 가끔은 소설도 쓴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제 남편이에요. 처음부터 이상하게 끌렸어요. 그 지긋지긋한 연애에 지쳐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넉넉해 보이기도 했어요. 저는 그에게 다가갔어요.

처음 뵙겠어요. 시나리오를 쓰신다면서요?”

.”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침묵이었지요. 저는 머쓱해졌어요. 다시 말을 건네보았습니다.

다른 일도 하신다면서요?”

.”

그는 귀찮다는 듯이 내뱉고는 술을 들이켰습니다. 더 이상은 말을 붙이기 힘들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을 붙여왔어요.

그만 끝내요. 인생은 짧습니다.”

?”

그는 턱으로 탁자 끝에 앉아 있는 제 애인을 가리키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저 친구 말입니다. 정액받이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잖습니까?"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지만 낮게 뇌까리는 그의 말은 귓전에 오래 남았어요. 이상한 힘이 실려 있어서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거든요. 마치 노래방 기계의 에코 효과처럼 여러 번 울리는 것 같았지요. 저는 너무 놀라 다시 물었습니다.

......액받이라뇨?”

됐습니다. 그만 합시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계속 신경을 쓰고 있던 제 애인이 그와 저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애인이 일어섰지요.

, 이 새끼야. 말조심해.”

애인이 맥주병을 든 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상황을 몰라 허둥댔지요. 하지만 남편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짧게 한마디 던졌을 뿐이었습니다.

이봐, 친구. 다음 달에 프랑스로 유학 가는 거 이 여자도 알고 있나?”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애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는 몇 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괜한 데 힘쓰지 말고 유학 준비나 잘해.”

애인은 선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그 얘기는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제 애인을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 이 영화는 끝내고 가야지.”

도대체 무슨 소리야?”

, 갈 때 가더라도 마무리는 하고 가야지.”

애인은 멍하니 주저앉아 중얼거렸습니다.

미안하게들 됐다. 일이 어쩌다 보니......”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게 말했습니다.

여기 계속 있을 겁니까?”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애인이 저도 모르게 프랑스로 떠난다는 소식에 망연했고, 삽시간에 벌어진 이런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를 따라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애인 쪽을 바라보니까 제 눈길을 피하더군요.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술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그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저는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저와 제 애인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계시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피곤하죠.”

그는 심드렁하게 내뱉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건 그의 말버릇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 같았죠.

어쩄든 우리는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 사람 말대로 옛날 애인은 한 달 만에 프랑스로 영화 유학을 떠나버렸구요. 예술 전문 대학을 갓 졸업한 영화학도 여자와 함께 말이죠. 그가 떠나고 나자 그 사람과 나는 더 가까워졌고 자주 만나게 되었죠. 세 달 만에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그 결혼을 반대했었습니다. 어딘가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뭔가 께름칙하다는 거였어요. 부모님들은 이유를 찾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고아인데다가 친척도 하나 없었는데, 그게 이유가 됐어요. 부모가 반대하니까 더 힘이 났어요. 남편의 좋은 점만 보이는 거예요. 사실 남편에게 푹 빠져 있기도 했었지만요.

아마도 제 남편이 그전 남자와 180도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가진 결점을 남편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를 않았거든요. 급한 성미도 없었고 우유부단하지도 않았고 감정처리를 제대로 못해 뒤끝이 지저분하지도 않았고 항상 여유롭고 당당했어요. 세상의 흐름에 무심했고 자잘한 일에 일희일비하지도 않았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세상사에 통달한 사람 같았습니다. 성욕도 없어 보였는데 그것조차 그때는 멋있어 보였어요. 결혼을 약속한 그런 사이가 되면 남자들 으레 같이 자고 싶어 하잖아요.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거든요. 매력적인 인물이었지요. 지금이야 그 모든 게 결점으로 보이지만요.

여하튼 그때만 해도 남편이 이상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딱 하나 미심쩍은 데가 있기는 했어요. 남편은 제 생각을 읽고 있었어요. 이를테면 제가 커피를 마셔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제 것까지 알아서 주문을 해버리는 거예요. 왜 제 것까지 주문하세요? 하고 물으면 커피 마시고 싶을 것 같아서라고 말하죠. 제가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택시를 잡고 있어요. 보통 땐 그냥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말이죠. 제가 부모의 반대 때문에 걱정하고 있으면, 너무 걱정하지 말아, 며칠 못 갈 거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럼 정말로 며칠 후에 부모가 승낙을 하고, 그런 식이죠.

신혼 여행 첫날밤에 호텔 방에서 와인을 마셨지요. 그때 제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 남자 처음 아니에요.”

남편은 저를 아무 감정도 없는 눈길로 쳐다보더니,

술이나 마시지.” 하는 거예요.

정말 괜찮아요?” 하고 제가 되묻자 남편은,

왜 내가 시간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당신을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마음쓰지 마.”하면서 웃더군요.

자기 말대로 남편은 그 일에 관해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답니다. 처음엔 고마웠죠. 참 넓은 사람이구나. 여느 한국 남자들과는 달라. 이렇게 생각했죠.

첫날밤에 있었던 일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꼭 해야 되는지 망설였는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둘이 침대에 함께 들었는데 남편이 한 시간 정도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거예요. 저는 살며시 몸을 붙여갔죠. 남편은 미동도 않는 거예요.

그냥 잘 거예요?”

곧 지겨워질 거다.”

뭐가요?”

섹스.”

그래서요?”

잠들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오늘은 우리들의 첫날밤이잖아요.”

첫날밤. 당신의 첫날밤이라......”

저는 남편이 제가 과거가 있는 여자라 그러는 줄 알고 자격지심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는데, 남편의 다음 말을 들어보니 그건 아니었어요.

나를 기억해주겠나?”

?”

이 첫날밤을 기억해주겠느냐고?”

그럼요. 죽을 때까지.”

고맙다. 처음이라는 건 참 아득한 거다.”

그러면서 남편은 낮고 작은 숨결로 탄성을 토하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어요. 그때, , 이 사람 참 외로운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제가 안아주자 그는 서서히 제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의 몸이 뜨거워졌어요. 완전히 제 몸속으로 들어온 그는 오래도록 미동도 없이 저를 안고 있었어요. 그런 포옹은 처음이었어요. 무덤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지요. 그것만으로도 완벽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그의 품에 안긴 채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어요. 참 신기한 일이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신혼 첫날밤이었고 포옹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피곤했었나. 저는 호텔 방 창으로 억세게 밀려드는 햇살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었는지 말이죠.

 

 

제가 남편을 처음으로 의심하기 시작한 건 결혼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그전까지는 그저 좀 특이한 사람이려니, 작가라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려니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좀 이상했어요.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남편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더니 마루로 나가더군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상했죠. 그래서 가운을 걸치고 따라나가 봤더니 남편이 없는 거예요. 글 쓰러 서재에 들어갔나 싶어서 서재 근처에서 얼쩡거려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남편은 자기가 작업하는 서재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괴벽이 있었는데 그쯤은 저도 이해하고 있었거든요. 한번은 무심코 서재 방에 들어갔다가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남편이 그렇게까지 큰소리를 내는 건 처음 봤거든요. 굶주린 야수 같았어요. 사람 소리 같지 않은 괴성을 질러대는 거예요.

그 생각이 나서 서재에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앞에서 계속 서성거려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자판이 타닥거리거나 의자가 삐걱거리거나 여하튼 최소한의 소리라도 나야 정상일 텐데 말이죠. 저는 남편이 좋아하는 녹차를 가지고 다시 서재 앞으로 갔어요. 똑똑. 제 노크에도 아무 응답이 없었어요. 문을 살짝 밀어보니 열리더군요. 안은 캄캄했어요. 도대체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이 밤중에 이 남자는 소리도 없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저는 조용히 남편을 불러보았습니다. 여보, 여보. 그때 그 캄캄한 서재에서 그가 걸어 나왔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녹차 잔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거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남편은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누워버렸습니다.

그가 갑자기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그 방엔 뭐가 있는 걸까. 나는 그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그가 쓴 몇 편의 글 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한번도 제게 말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고아였다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들이 있었겠지. 그냥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간첩일까? 혹시 저 방에 무선 교신기와 난수표책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도 들기 시작했지요. 침실에 누워 있는 남편 옆에 함께 누우며 말했습니다.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알아서 뭘 할건가?”

전 당신 아내예요. 알 권리가 있잖아요.”

말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벌써 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아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필요하지 않을 때도 많다. 지금이 그렇다.”

그래도 말해 주세요.”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 너도 말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게 편하지 않나?”

이해할 수 없어요.”

어차피 세상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차고 넘친다.”

그러곤 남편은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럼 왜 저랑 결혼하신 거죠?”

누구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한다면 거짓말이거나 무지의 소치다. 나도 답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견디기 위해서다.”

뭘 견디죠?”

시간이다.”

그날부터 제 인생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알아야겠다는 욕망이 용솟음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먼저 그의 시를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전에도 몇 편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들뜬 마음에서였는지 별느낌이 없었는데 이때부터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그의 시는 거의 모두가 죽음과 소멸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됐어요. 그의 시집 해설을 쓴 한 평론가의 말을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이 시인의 세계 속에서 삶이란 원심분리돼야 마땅할 불순물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달궈진 철판 위에서 추어야 하는 영원의 춤이며 바닷속에 가라앉은 호리병. 그 속에서 천년 만년을 기다려야 하는 요괴의 신세일 뿐이다. 그는 시에서 삶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추방하고 죽음에 대한 무한한 동경만을 담아놓았다. 어디에서 이 도저한 허무주의가 발원한 것일까. 누가 이 젊은 시인의 가슴속에 삶에 대한 극한의 염증만을 심어놓은 것일까.

 

 

남편이 썼던 단편 영화 시나리오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날 삶이 무한정 계속될 거라는 망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죽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일본군을 따라온 네덜란드 군목에 의해 흡혈귀가 되었다고 믿게 됩니다. 이 네덜란드 군목이 흡혈귀였던 거지요. 1592년 이래로 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왔다고 믿는 이 남자는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내가 자신을 견딜 수 없다고 믿는 거지요. 또한 가족들과 친구들 모두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단지 그들이 흡혈귀인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잘해주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흡혈귀였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왔다고 믿었습니다. 흡혈귀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흡혈귀로서의 모든 속성을 버리고 인간이 되기 위해 몸부림쳐왔다고 말이죠. 그는 갑오 농민 전쟁을 기억해내고 3.1 운동을 기억해내고 8.15 해방을 기억해냅니다. 그가 인간이 되기 위해 잊어왔던 그 오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흡혈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정신과 의사를 동원합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의 증세가 망상형 전신분열증이라고 진단하지요. 그는 강제로 입원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정신병원에는 자신이 흡혈귀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었지만 나중에는 간호사들, 심지어는 그를 치료했던 의사마저도 자신이 흡혈귀가 되었다고 여기게 됩니다. 결국엔 정신병원의 모든 환자와 간호사들이 그 지경이 됩니다.

그들은 집단으로 병원을 탈주하고 차량을 탈취하여 도로를 질주합니다. 그 차량 행렬이 바다로 향하고 경찰은 추격합니다. 그들은 절벽으로 몰립니다.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달려와 그를 부릅니다. 너는 흡혈귀가 아니야. 다른 환자들의 가족들도 함께 외칩니다. 정신차려라. 넌 흡혈귀가 아니야. 제발 정신차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합창처럼 울려퍼집니다. 그러자 절벽에 늘어선 흡혈귀들도 입을 모아 외칩니다. 우리는 흡혈귀다(그때 장엄한 레퀴엠이 배경 음악으로 깔려야 한다고 남편은 적어놓았습니다).

경찰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갑니다. 당신들은 포위됐다. 저항하지 말고 즉시 투항하라. 그러자 주인공이 말합니다. 좋다. 간다. 우리가 누군지 보여주마. 그들은 서서히 경찰과 가족들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경찰과 가족들은 한 발짝씩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흡혈귀가 아니라고 그렇게도 외치던 가족들도 모두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흡혈귀들은 뛰어옵니다. 급기야는 경찰도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수백의 흡혈귀들이 그들에게 달려가고 삽시간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번엔 경찰과 가족들이 절벽 쪽으로 몰립니다. 흡혈귀들은 끝까지 그들을 추격합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흡혈귀들도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추락합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이 진짜 흡혈귀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도 모르고 다른 누구도 모르지요. 다만 그들이 진정한 흡혈귀였다면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는 자막만이 마지막에 올라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이런 줄거리예요. 제 남편은 과연 이런 영화가 정말로 제작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던 걸까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번엔 남편의 평론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여러 문예지들을 뒤적여가면서 말이죠. 그 평론들에서도 같은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남편이 예찬한(냉소적인 어투이긴 하지만요) 소설이나 시는 모두가 죽음이나 삶의 허무를 다룬 것들이라는 점을요. 미시마 유키오를 비롯한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있었고, 오스카 와일드나 로트레아몽, 보들레르의 작품들도 있었고, 최근 평론에선 선생님의 장편소설까지 언급했더군요.

한편 이런 식의 퍼즐 게임보다 더 확실한 증거들도 포착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저는 조심스럽게 그의 서재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의 서재는 여느 사람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런데 책꽂이 옆에 이상한 나무 상자가 놓여 있는 거였어요. 책 상자인가 싶어서 들춰보았죠. 하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다시 뚜껑을 닫고 나서야 전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건 관이었습니다.

남편이 전날 서재에 갔던 이유가 바로 그 관에서 자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답니다.

남편은 흡혈귀였던 겁니다. , 맙소사. 저는 침착해지기로 했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찬찬히 돌이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투성이였습니다. 섹스부터가 그랬습니다. 남편은 철저히 무관심했거든요. 횟수까지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다른 부부보다는 훨씬 적으리라고 생각돼요. 한다 해도 무심히 해치울 뿐이에요. 게다가 사정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결혼 초에 제가 콘돔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그는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거든요. 그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또 남편은 모르는 것이 없었어요. 조선 시대 고전 문학부터 영미 문학, 신소설부터 최근의 현대 소설까지 읽지 않은 작품이 없습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시겠지요? 사실이에요. 그가 쓴 글에 등장하는 그 엄청난 참고 서적들을 한번 보세요. 제가 어쩌다 어떤 소설에 대해 물어보기라도 하면 줄줄줄 외워서 답을 해주곤 했다니까요. 어떻게 서른다섯의 남자가 그 많은 것들을 다 읽을 수가 있었을까요.

남편은 먹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뭐든 주는대로 아주 조금씩만 먹거든요. 또 식성도 특이합니다.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 사람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아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남편은 한 달이 다되도록 김치에 젓가락 한번 대지 않아요. 제가 새로 담근 김치라고 채근하면 그제야 한번 입에 대는 정도지요. 남편이 그나마 잘 먹는 것은 피가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 정도예요.

그가 보는 영화는 또 어떤 줄 아세요? 사실 할리우드 영화 재미없다는 사람 없잖아요? 물론 예술 영화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할리우드 영화를 재미없다고는 못할 거예요. 멋진 사랑이 있고 숨막히는 스릴이 있고 감동이 있거든요. 같은 값이면 이 모든 게 다 들어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남편은 아니에요. 남편이 좋아하는 영화, 이제 선생님도 짐작하시겠죠? 컬트 영화라는 거 있잖아요. 기계톱으로 사람을 썰고, 사람 고기로 정육점을 차리고, 뭐 그런 영화들 있잖아요. 그게 아니면 끝도 한도 없이 지루하고 허무한 영화를 보고 있어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따위 말이죠. 한번은 제가 물어봤어요.

지겹지 않아요?”

인생보다는 낫다.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

이런 식이에요. 남편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이유도 아마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거예요. 남편이 하는 컴퓨터 게임이란 고작 테트리스이거나 지뢰찾기죠. 그 이유도 물어봤어요. 다른 재밌는 게임도 많은데 왜 하필 그런 것들만 하느냐고.

테트리스는 무한한 반복이다. 쌓음으로써 부수고 부숴야 쌓는다. 테트리스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좋다. 삼국지나 심시티처럼 인생을 모사하는 게임들은 싫다.”

더 결정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침대를 정리하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 거예요. 뭐냐 하면 남편이 자고 일어난 베개 근처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었다는 거죠.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남편이 머리를 감고 난 욕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저를 소름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eh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결혼한지 몇 달 안 됐을 무렵 그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자 그는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그런 눈은 처음 보았어요) 저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그건 싫다.”

왜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걸요. 아이 낳고 키우면서 지지고 볶으면서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늙어 외롭지 않겠어요?”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은 죄악이다.”

그때는 그의 그런 말이 단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알게 모르게 제게 흘려왔던 거예요. 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알고 보면 그도 외로운 사람이겠죠. 그래서 그와의 섹스는 무미건조하지만 포옹만큼은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섹스보다 이렇게 안고 있는 게 좋다. 이게 영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세상의 시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안고 있으면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벌레라도 상관없다. 지금의 내 몸을 나는 증오한다.”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그의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읽을 수 없이 낡아빠진 고서 묽음들. 일제 시대의 사진들. 그 중에서 몇 장의 사진은 단체 사진이었는데 꼭 한 명의 사진만은 예리하게 칼로 잘려나가고 없었습니다. 아마도 고등학교쯤의 졸업 사진인 듯한데 열두 명쯤의 학생이 교모를 쓰고 삼열 횡대로 도열해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맨 뒷줄의 한 사람만은 도려내어져서 없었습니다. 저는 그게 제 남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다른 사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EH 한 장의 사진에는 쪽찌고 한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가소곳하게 서 있었습니다. 입은 한복의 풍으로 미루어보건데 혼례복임에 분명했습니다. 옆에 있어야 할 남자는 물론 도려져나가고 없었습니다. 저는 뒷면을 보았습니다. ‘광무 3, 칠월 열하루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박춘식, 이분이라고 초서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의 그때 이름은 박춘식이었던 거지요. 저는 이분이라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벌써 할머니가 되었을, 아니 황천으로 떠난 지 오래되었을 그 여자를 말이죠.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남편은 살아왔을까. 그 사람들을 다 기억하기는 할까. 그때 저는 문득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소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 소설은 선생님의 단편 도드리에 잠깐 언급되기도 했었지요.

바로 그 소설에도 제 남편처럼 영원히 살아야 하는 남자가 나오지요? 그리고 그 남자와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오고요. 제가 바로 그런 여자가 된 겁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에게 저는 무한한 여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1을 무한대로 나누면 뭐가 되는지 아세요? 0입니다. 저는 0이에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누구도 이런 상태를 견딜 수는 없을 거예요. 그 어떤 바람둥이 남편과 사는 여자라도 저보다는 나을 거예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자 저는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세요.”

무슨 비밀을 말하라는 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세요.”

당신이 보고 있는 그대로가 바로 나다.”

남편은 차분했습니다.

당신이 흡혈귀라는 걸 알아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도요.”

바보 같은 소리다.”

왜 당신은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죠?”

나의 결벽증 때문이다. 일어나기 전에 다 치운다. 화장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시나리오는 자기 이야기지요?”

많은 독자들이 작가와 화자를 혼동한다.”

당신이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요. 너무 많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이제 아무 흥미도 못 느낀다는 걸 전 알아요.”

섹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섹스를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 왜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거죠

모두가 다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이 사회가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왜 당신의 시와 평론에는 죽음을 찬미하는 소리만 가득한 건가요?”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은 행복과 희망으로 가득한가?”

당신 서재에 있는 저 관은 뭔가요? 저거야말로 당신이 흡혈귀라는 피할 수 없는 증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잘 권리가 있다. 나는 오래도록 독신으로 살아왔다. 세상의 소음과 빛이 싫었을 뿐이다. 저곳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그뿐이다. 당신이 나를 흡혈귀라고 믿는 건 당신의 자유다. 당신의 오해를 교정하려면 나는 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당신을 흡혈귀로 만들던가.”

대화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를 당해낼 재간이 저에겐 도저히 없었어요. 남편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신 우울해했습니다. 우리는 오랜 냉전을 계속중입니다. 남편이 흡혈귀인 이상, 불멸하는 이상, 더 이상 그와 살 수는 없습니다.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아이를 낳고 남편과 함께 팝콘을 먹으며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주말이면 놀이동산에 가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 흡혈귀 남편과 살고 있는 제게는 그 모든 것이 꿈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입니다.

남편과 헤어지려고 합니다. 남편이 불쌍하긴 하지만 저는 제 유한한 삶이나마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남편과 갈라서려고 마음먹은 마당에 궁금한 것이 딱 하나 있더군요. 도저히 해명되지 않는 것. 왜 그는 흡혈귀면서도 피를 빨지 않을까. 그가 나를 흡혈귀로 만들면 간단할 것을, 왜 그러지 않았을까.

저는 다시 남편의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도 검색을 해보았지요. 그 속에서 아주 짧은 메모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시 같기도 하고 산문 같기도 한 글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선생님은 아시겠죠? 남편과 그의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서히 적응해왔던 거예요. 그러면서 그들은 흡혈귀의 본능들을 상실해갔던 거죠. 빛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죠. 더 이상 피를 먹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그들은 밥이든 빵이든 구해야 했고, 그러자면 생활인이 되어야 했던 거죠. 그러지 않으면 늘 허기에 시달릴 테니까. 제 해석이 어때요? 그럴듯하지요?

이렇게 하여 제 남편에 대한 모든 궁금증은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혼 수속을 밟아야 할지, 또 수월하긴 할지 걱정입니다. 어쨌거나 다 털어놓고 나니까 시원합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거든요. 아마 누구든지 저더러 미쳤다고 할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만은 믿어주실 것 같아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펜을 들었습니다. 답장 바랍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도곡동에서

김희연 올림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그녀가 동봉한 참고 자료는 지면 관계상 공개하지 않는다. 다 저 편지 속에 요약된 것들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남편을 알고 있다. 그는 내 동료 문인이며 그녀 말대로 내 소설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흡혈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 유심히 보아야겠다. 그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동. 서양을 아우르는 문학적 식견이 그의 천재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살아온 덕택이라는 그녀의 말은 내게 힘을 준다. 그는 내게 언제나 콤플렉스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살다보니 별 신기한 일도 다 보겠다. 이제 여러분도 그의 글을 찬찬히 살펴보기 바란다. 죽음에 대한 무한한 찬미와 삶에 대한 도저한 허무주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동료 문인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하자. 조금만 눈 밝은 독자라면 금세 짐작이 갈 것이다.

그녀에게선 아직 전화가 없다. 이 글이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생각엔 아무래도 바로 그녀가 흡혈귀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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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간 여행 (by 박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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