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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김용준의 근원수필

박인애2018.10.23 12:58조회 수 11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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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원수필은 김용준이 1930-1940년대에 썼던 산문을 엮은 책이다

 그는 1904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동양화가이고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했으며 수필가다서울대 미술대학 학장, 625때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월북작가라는 이유로 1948년에 발행되었던 이 수필집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다가 전쟁 시절 피난지 부산에서 이 책을 탐독했던 민시인이 1986년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소설가 최현식 씨의 서재에서 이 책을 발견하여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납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처가 내려지기 한 해 전인 1987년 범우사에서 발간되었다.  좋은글 두편을 소개해 본다. 김용준과 가까운 친구들은 당시의 지식인예술가였다. 그들의 삶과 사상을 엿볼수 있는 글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에 이 책을 구해서 다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매화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墨痕)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실례의 말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盛開)하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방아를 찧어 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를 황혼 가까이 찾아갔다는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매화에 달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흔히 세상에서도 매화를 말하려 함에 으레 암향(暗香)과 달과 황혼을 들더군요. (연래로 나는 하고많은 화초를 심었습니다봄에 진달래와 철쭉을 길고 여름에 월계와 목련과 핏빛처럼 곱게 피는 달리아며 가을엔 울밑에 국화도 심어 보았고 겨울이면 내 안두(案頭)에 물결 같은 난초와 색시같은 수선이며 단아한 선비처럼 매화분을 놓고 살아온 사람입니다철 따라 어느 꽃 어느 풀이 아름답고 곱지 않은 것이 있으리오마는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 내 머리에서 모든 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그러나 오히려 내 기억에서 종시 사라지지 않는 꽃 매화만이 유령처럼 내 신변을 휩싸고 떠날 줄을 모르는군요매화의 아름다움이 어디 있나뇨세인이 말하기를 매화는 늙어야 한다 합니다그 늙은 등걸이 용의 몸뚱어리처럼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띄엄띄엄 몇 개씩 꽃이 피는 데 품위가 있다 합니다매화는 그 어느 꽃보다도 유덕한 그 암향이 좋다 합니다백화(百花)가 없는 빙설리(氷雪裏)에서 홀로 소리쳐 피는 꽃이 매화밖에 어디 있느냐 합니다혹은 이러한 조건들이 매화를 아름답게 꾸미는 점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내가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실로 이러한 많은 조건이 멸시(蔑視)된 곳에 있습니다그에 대하매 아무런 조건 없이 내 마음이 황홀하여지는 데야 어찌하리까매화는 그 둥치를 꾸미지 않아도 좋습니다제 자라고 싶은 대로 우뚝 뻗어서 제 피고 싶은 대로 피어오르는 꽃들이 가다가 훌쩍 향기를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제가 방 한구석에 있는 체도 않고 은사(隱士)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품이 그럴 듯 합니다나는 구름같이 핀 매화 앞에 단정히 앉아 행여나 풍겨 오는 암향을 다칠세라 호흡도 가다듬어 쉬면서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힘을 니다그는 앉은 자리에서 나에게 곧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일전이었던가요어느 친구와 대좌하을 때 내가 “X선생 댁에 매화가 피었다니 구경이나 갈까?”하더니 내 말이 맺기도 전에 그는 자네도 꽤 한가로운 사람일세하고 조소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나는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어찌어찌하다가 우리는 이다지도 바빠졌는가물에 빠져 금시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 친구 인사나 한 자다면 건져 주었을 걸하는 국풍의 침착성은 못 가졌다 치더라도 이 커피는 맛이 좋으니 언짢으니 이 그림은 잘 되었는지 못되었느니 하는 터수에 빙설을 누경(屢徑)*하여 지루하게 피어난 애련한 매화를 완상할 여유조차 없는 이다지도 냉회(冷灰)같이 식어버린 우리네의 마음이리까? (13~17)

 

누경거듭 이겨 냄.

 

2. 검려지기(黔驢之技)

 

 (호를 짓는 장난도 일종 풍류라 내 하는 짓이 종시 풍류로 끝막고 말 바에야 구구하게 남이 내 이름 알고 모름에 개의할 바 있으랴한데 근간에 썩 좋은 호 하나를 또 얻었다가로대,검려(黔驢)’어느 선배 한 분이 내 인상이 험하다 하여 꼭 검려(黔驢)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검주(黔州땅에는 나귀가 없었다장난꾼 한 녀석이 나귀 한 마리를 끌어다 산밑에 매어 두었다호랑이란 놈이 하루는 내려와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이상한 동물이 떡 버티고 섰는데 방연대물야(龐然大物也)’라 거무뭉틀한 놈이 커다란 눈깔을 껌벅거리며 섰는 꼴이 어마어마하게 무섭게 보던지 이건 아마 산신령님인가 하지나귀란 놈이 소리를 냅다 지르는데 호랑이란 놈이 깜짝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갔것다그러나 그 후 매일 듣고 나니 그까진 소리쯤 무서울 것 없다한번은 바짝 덤벼들어 나귀를 못살게 굴었더니 나귀란 놈이 귀찮아서 뒷발로 냅다 걷어찼다호랑이가 보니까 기껏했자 나귀의 재주란 그뿐인 모양이라 그만 와락 달려들어 물어 뜯고 발길로 차고 하여 죽여버렸다유종원의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다아마 나란 사람이 처음 대할 때 인상이 험하고 사귀기 어렵고 심사도 고약한 듯하다가 실상 알고 보면 하잘것없는 못난이요 바본데 공연히 속았구나나와 만나고 사귀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되나보다그래서 나를 검려하고 이 분은 말한 것이었으나 나는 이 검주의 나귀에서 더 절실하게 나를 풍자하는 일면을 느낀다그 놈은 어리석지 아니하냐자기의 우졸함을 감추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냐좀 리하여 장졸(藏拙)*하는 지혜쯤 가졌어야 험한 세파를 헤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으냐어쩌면 그렇게도 야단스런 차림새를 하고 어쩌면 그렇게도 시원찮은 발길질을 눈치도 없이 쉽사리 하여 금시에 남의 놀림감이 된단 말이냐고양이처럼 리하든지 양처럼 선량하든지 사슴처럼 날래든지 그렇지 않으면 공작새처럼 화려나 하든지 그도저도 못되는 허울 좋은 나귀게다가 또 못생긴 값에 재주까지 부리느라고 논다는 꼴이 남의 수치만 사는 짐승오호라나도 이 나귀처럼 못생긴 인간인가나도 이 나귀처럼 못생긴 재주밖에 못 부리는가.(24~26)

 

*장졸자기의 잘못을 감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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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I have a dream (by 박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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